가을빛에 물든 괴산, 마음까지 물들다

날이 흐린 10월 넷째 주 일요일 오후, 점심을 먹고 아내와 모처럼 드라이브에 나섰다. 서로 일상에 쫓기다 보니 함께 바람을 쐴 시간조차 좀처럼 내지 못했는데, 이날은 마음먹고 여유를 가져 보기로 했다.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운전대를 괴산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로 돌렸다. 마침 그곳에서는 지역 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다고 했다. 산세가 수려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괴산은 언제 찾아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구름이 낀 하늘 아래 날씨는 선선했다. 괴산으로 향하는 차창 밖 풍경에서는 짙어 가는 가을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산은 서서히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고, 들판에는 누렇게 익은 곡식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정겹다. 문득 어린 시절 부모님을 도와 추수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수확한 곡식을 가득 싣고 지나가던 달구지의 덜컹거리는 소리마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농민들에게는 한 해 동안 땀 흘려 가꾼 결실을 거두는 중요한 시기다. 길가의 사과밭에는 빨갛게 익은 사과들이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미소 짓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보기만 해도 알차고 먹음직스러워 입맛을 돋웠다. 풍성한 가을의 정취를 가슴 가득 담고 달리는 사이, 차는 어느덧 목적지인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에 다다랐다.

그런데 오후 시간인데도 은행나무길로 향하는 도로는 차량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편도 1차로인 데다 방문객까지 몰리다 보니 길은 더욱 혼잡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달린 끝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세울 만한 주차 공간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을 몇 번이나 빙글빙글 돌며 빈자리를 찾던 중, 마침내 한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재빨리 차를 세우고 나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마치 로또에 당첨된 것만 같았다.
넓은 주차장은 이미 차량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주변 도로의 갓길에도 방문객들의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괴산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답게 수많은 인파와 차량이 몰린 모습을 보니 이곳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은행나무길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앞을 가득 채운 것은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이었다. 마치 누군가 노란 물감을 온 세상에 칠해 놓은 듯 주변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 온 은행나무 사이를 걷고 있자니 마치 동화 속 왕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수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은행나무 아래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며 추억을 남기기도 했다. 길게 늘어선 황금빛 은행나무 터널은 가을의 운치를 한층 더해 주었고, 저수지에 비친 은행나무의 모습은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방문객들은 저마다 저수지에 비친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고,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을을 즐기고 있었다. 나 역시 은행나무길의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일상에 쌓였던 피로를 조금씩 털어 냈다.
예전과 달라진 풍경이 있다면 인근에 조성된 코스모스밭이었다. 드넓은 꽃밭은 활짝 핀 분홍빛 코스모스로 가득해 나들이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와 분홍빛 코스모스가 어우러져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가을의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하고 마음을 설레게 한다. 형형색색으로 피어난 가을꽃들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고, 일상에 지친 심신에 작은 위로와 휴식을 선물했다.
비록 은행나무길은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다소 복잡했지만, 내 마음만큼은 한없이 가볍고 날아갈 듯했다. 일주일 동안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걷는 동안 몸과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고, 새로운 한 주를 살아갈 힘도 차오르는 듯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마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치유의 약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가을의 정취를 한껏 만끽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아내와 함께 나눈 소소한 대화와 황금빛 은행나무길의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넉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내게 미소를 선물하고, 가을이 건넨 작은 위로가 삶의 활력으로 돌아온 하루였다.
그날의 가을은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으로 내 마음속에 깊이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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