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온 취재본부장
자치단체장이 시민들에게 약속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특히 재정이 수반되는 공약이라면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 재정 여건과 실행 가능성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시민들의 환심을 사 표를 얻기 위한 약속에 그친다면 이는 기만과 다를 바 없다. 선거 전과 당선 후의 말이 달라진다면 시민들이 그 자치단체장을 신뢰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대전시장으로 당선된 허태정 시장이 최근 ‘대전형 고유가 피해 재난지원금’ 지급 공약을 사실상 철회했다. 재정 여건이 어렵다는 것이 이유다. 허 시장은 후보 시절 대표 공약으로 시민 1인당 20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그러나 취임 이후 이 공약은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대전시의 재정 여건상 2,0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대신 허 시장은 ‘온통대전 2.0’의 캐시백 확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허 시장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상황에 따라 선거 당시의 공약을 지키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불가피하다면 공약을 수정하거나 철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아쉬움을 넘어 경솔한 판단이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대전시의 재정 여건이 당선 이후 갑자기 나빠진 것은 아니다. 전임 시장 때부터 대전시의 재정이 넉넉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후보 시절 공약을 내걸기 전에 충분한 재정 검토가 선행됐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 있게 약속하고, 취임한 지 불과 두 달여 만에 사실상 철회하는 모습은 시민들로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실 허 시장이 후보 시절 시민 1인당 20만 원 지급을 약속했을 당시에도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선거 과정에서는 실현 가능한 공약인 것처럼 자신 있게 약속해 놓고, 당선된 뒤 재정 문제를 이유로 발을 빼는 것은 공직자로서의 신뢰를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공약은 단순한 선거 구호가 아니다. 시민들에게 한 약속이며, 당선된 이후에는 행정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특히 현금성 지원처럼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 공약이라면 다른 어떤 공약보다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재원은 어디에서 마련할 것인지,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지, 다른 사업의 예산을 줄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 등을 선거 전에 충분히 검토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취임한 지 두 달여 만에 핵심 공약을 사실상 철회한 것은 안타깝고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허 시장은 이 문제와 관련해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설명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단순히 “재정 여건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시민들의 의문을 해소하기 어렵다.
선거 전에는 왜 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런데 취임한 뒤에는 왜 불가능해졌는지 그 과정과 판단의 근거를 시민들에게 솔직하게 설명해야 한다. 공약을 내세웠다가 당선된 뒤 ‘이게 아니다’ 싶으면 철회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시민들은 앞으로 어떤 약속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모두 ‘공약(空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공약을 변경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선거 당시부터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던 재정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충분한 검토 없이 시민들에게 장밋빛 약속을 하고, 당선 후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유로 철회한다면 결국 시민들에게 ‘희망고문’을 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허 시장이 시민들에게 진솔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시민들에게 약속하는 일은 쉬울 수 있지만,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자치단체장의 공약은 더 신중해야 한다.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약속은 필요하지만, 지킬 수 없는 약속으로 시민들에게 또 다른 실망을 안겨서는 안 된다. 희망고문이 될 수 있는 공약은 이제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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