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연 시인.수필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과 그를 바탕으로 한 인격을 바로 세우는 일을 덕이라고 하고 이런 것들을 모아서 정리된 사고(思考)의 일갈(一喝)을 소신(所信)이라고 한다.
보신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면 소신은 자신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신은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지만, 소신은 수많은 사람의 안위를 도모한다. 보신은 일시적 성공으로 보일 수 있으나 소신은 영구적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신(所信)이 있는 사람은 상황의 유불리에 연연하지 않으며, 쓴소리를 반기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내놓고 멀리 보고 살핌으로서 사안의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을 알고 생각이 정리되면 다소의 무리가 따른다고 할지라도 의연히 대처해 나간다. 그것이 자신의 말로가 좋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세상이 많이 혼탁해졌다. 사방을 둘러봐도 만용을 부리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나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고, 지식도 있다 하나 양심에 따라 지식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본인에게는 소신인 것이 간혹은 타인에게 아집이나 융통성 없는 것으로 곡해돼서 인간관계(人間關係)나 거래에 악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나 또한 꽤 소신 있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맘고생을 여러 번 하다 보니 이젠 적당히 눈치 보고 더불어 편승하며 살아가는 쪽이 세상살이에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적당히 방관하거나 적당히 동조하는 것이 상처받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세상(世上)으로부터 배웠다.
대쪽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의 일화를 책으로 읽거나 무용담으로 전해 듣는다. 하지만 책 속의 그들은 굽히지 않는 소신으로 인해 대부분 고초를 당하고 생(生)의 말로(末路)는 불행했다.
영화를 보면서도 내가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존경심을 갖고 대리만족은 하면서도 그저 위인전이나 영화에 나올 법한 사람들의 특별한 삶으로 제쳐 두었다. 아쉽게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내 자신이 아무리 잘나도 사회적 통념이나 상식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적당히 눈치 보고 염치를 찾고 보조를 맞추며 사는 것이다. 막말로 치고 빠지는 것을 잘해야 사회생활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분명히 잘못되고 아닌 일인 줄 알지만 윗사람이나 대다수의 의견이기 때문에 소신을 말하지 못한 경우가 우리는 얼마나 많았던가.
특히 권위주의나 상명하복(上命下服)이 뿌리 깊은 우리나라에서 소신 있는 사람은 자칫하면 찍혀서 불이익을 당하고 만다. 소신이랍시고 나의 의견을 말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고 애꿎게 사회생활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결국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잘 참는 사람이 무던하고 좋은 사람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고 외형상 성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생의 선배들은 말한다. 세상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쥐고 흔들 뿐 원래 공정하지 않다고, 앞장서서 큰 소리를 내고 자기주장을 하면 오히려 희생당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시대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가만있다가 위로 올라가서 힘을 가진 다음에 자기주장이나 소신을 펼치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인가. 자문(自問)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權力)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힘은 침묵(沈默)이라고 한다.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그저 참고 입 다물면 적어도 배척당하거나 밥줄이 끊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더욱 견고해지고 결국 피해를 보는 사람은 침묵하고 방관한 사람이니 세상 살아가는 일은 쉽지가 않다. 산다는 것은 때로는 현명하게 비굴해지며 문득 짠해지는 내 자신을 다독이는 아픔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신껏 사는 삶이 가장 자랑스러운 삶의 방식이며 내 주위의 안위와 평화를 지키는 일임은 분명하다. 또한 내 뜻에 따르고 내 마음이 시키는 것을 하고,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다면 내 자신에게도 최상의 삶이 될 것이고 소신 있는 삶이 아니겠는가.
격(格)이라는 단어가 있다.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를 뜻하는 단어이다. 쉽게 설명하면 교사는 교사다워야 하고 학생은 학생다워야 하며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격에 맞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이다. 그럼에도 격에 맞게 사는 사람보다 격에 맞지 않게 사는 사람이 더욱 많은 세상이다.
속은 텅텅 비고 겉만 화려한 사람들이 많다. 내실을 다지기보다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격에 맞지 않는 행동을 반복하고, 격에 맞게 행동할 때 느끼는 스트레스 이상의 스트레스(stress)를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거나 우울증을 앓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 자살(自殺)을 하기도 한다.
격에 맞게 살면 짧은 기간 동안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지만, 격에 맞지 않게 사는 사람보다 오랜 기간 동안 편안한 삶을 누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격에 맞게 사는 것은 매우 중요(重要)하다. 각자 자신이 격에 맞게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계절(季節)에도 격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모두 격(格)이 있다. 만약 계절이 격에서 벗어난다면 재앙(災殃)이 올 것은 자명(自明)하다.
삶은 수분무환(守分無患)이다. 즉, 분수(分數)나 본분(本分)을 알면 걱정이 없다는 말이다. 격(格)에 맞게 사는 것은 분수나 본분을 안다는 것이다. 수분무환의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수입에 비해 지출이 많지는 않았는지, 월셋집에 사는 봉급생활자로서 승용차를 사지는 않았는지, 미래에 대한 대비는 하지 않고 명품을 구입하지는 않았는지, 수입대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는 않았는지, 평균수명 100세 시대에 걸맞은 노후대책도 없이 쓰기만 좋아하지는 않았는지 등 자신의 삶이 격(格)에 맞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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